[충청의창] 김성수 충북대 교수
세상의 모든 존재는 유형이든 무형이든 공간을 형성한다. 그 공간에는 들락거릴 수 있는 문이 달린다. 그리고 그 공간의 문에는 하나도 예외가 없이 자물쇠가 달린다. 이렇게 어느 문이고 아주 튼튼한 자물쇠가 여지없이 매달려있고, 물론 그 자물쇠를 여는 열쇠도 존재한다. 그 자물쇠에 맞는 열쇠는 공간의 비밀을 제공한다.
세상의 어떤 문이고 문은 들락거리라고 만들어놓은 존재이다. 모두가 쉽게 오고 갈 수 있는 문은 자물쇠가 필요 없다. 누구나 싸리문처럼 밀치거나 당겨서 들락거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문이 달린 공간은 객이 주인이다. 그리고 그 공간에는 비밀과 귀중함이 사라진다. 그래서 아주 비인간적(?)인 문이기에 인간이 살아가는 곳에는 그런 문은 찾을 수가 없다.
자물쇠는 늘 잠기어져 있어야 한다. 자물쇠를 열 수 없는 자는 늘 잠기어져 있는 자물쇠만을 바라다만 보아야 한다는 괴로움이 있지만 말이다. 성스러움을 모시는 신전에도 문이 달려 있다. 그 문에도 여지없이 자물쇠가 매달려 있고 보통은 굳게 잠겨져있다. 신을 향한 기도의 순간에 잠시 열렸던 신전은 절대로 항상 열려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신전의 문은 대부분 꼭꼭 잠겨 있다. 이렇게 신전의 문은 사람들이 만든 비밀의 자물쇠로 잠기어져 있다. 인적이 드문 깊은 산속의 신전에도 비밀의 자물쇠가 달려있다.
신전의 문만이 자물쇠를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도 누구나 예외 없이 자신만의 자물쇠를 최소한 하나씩 가지고 살아간다. 마음의 자물쇠는 보이지 않아서 들킬 염려도 없지만, 하나 둘 보인다 한들 대수도 아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매순간 마음속에 더 높고 튼튼한 벽들을 쌓아 올리고 커다한 문을 달고 육중한 자물쇠를 매달아 놓아야 한다.
그렇게 생명이 있는 존재들은 모두 자물쇠를 갖고 있다. 누구나 자신만이 쉬어야 할 방이 있어야하기 때문이다. 비록 그 방이 누추하여도, 나만이 쉴 수 있는 작은 공간에 열쇠 하나 정도는 깊이 나만이 아는 장소에 감추어 두어야 한다고 한다. 어쩌면 자물쇠의 존재는 모든 존재의 보호막일지도 모르겠다. 그 자물쇠가 너와 나의 인간적인(?) 거리를 확보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자물쇠가 소통의 단절일 수도 있다.
자물쇠로 잠겨 들어갈 수 없는 문을 허락 없이 열고 들어가면 누구나 도둑이 된다. 도둑이 된 다음에는 그 자물쇠가 그 도둑을 그 방에 가둔다. 살아가는 우주의 모든 존재들이 생명이라는 잔인한 쇠사슬에 묶여있고, 그 사슬에 커다랗게 매달린 자물쇠에 의존하여 힘겹게 존재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육신이라는 이 존재의 형태가 커다란 자물쇠 그 자체이라면 지나친 것일까? 왜 존재하는 것들은 이렇게 모두가 고통의 자물쇠를 달고 존재하여야 하는가!
세상에 존재하는 많은 비밀의 방문에는 커다란 자물쇠가 달려있다. 그 방문을 여는 열쇠는 쉽게 주어지지 않게 되어있다. 쉽게 얻은 것은 쉽게 버린다고 한다. 그래서 신전의 문이 쉽게 열리지 않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비밀은 비밀일 때가 신비롭다. 비밀이 일상적인 사실이 되어버리면 신비로움은 사라진다.
그래서 모든 살아있는 것들에게는 살아가는 것이 힘들게 되어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모든 문에는 자물쇠가 달려있다! 그 자물쇠에는 분명히 열쇠가 존재한다. 그 비밀을 여는 열쇠는 모든 생명체에게 쉽게 주어지지 않는다. 충분한 수고의 대가를 치루고 나서야 비밀의 방은 열리게 되어있다. 그 눈물겨운 수고로 인하여 비밀의 열매는 소중하게 다루어지기 때문이다.
우리는 오늘도 어떤 문 앞에 서있다. 수 없이 많은 생각과 고통을 요구하는 열쇠는 아마도 긴 힘든 시간을 인내해야하는 것 그 자체일 수도 있다. 그래서 고통은 비밀의 방문을 여는 신비로운 열쇠일지도 모르겠다. 삶이 고통이라고 한다. 그런 면에서 삶의 고통은 분명 그 자체가 열쇠일 수밖에 없다! 그 고통의 끝에 열리는 비밀의 방에는 무엇이 있는 것일까? 혹은 무의미한 비밀이어서 고통을 통하여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아닐까?